취미_말의 영혼으로 살기

[취미] 말의 영혼으로 살기 02. 발길질

your_text 2024. 3. 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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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그리던 시절
 
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시간이 지나 학교에 입학해서도 집요하게 앉아 그림만 열심히 그리고 있으니 어렸을 때의 그림 성취는 꽤나 뛰어났습니다. 꽤 괜찮았던 언어 성취보다도 어쩌면 더요. 실은 미술 쪽에 재능이 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때를 생각해 보세요. 한 반에 혼자 조용히 그림만 그리고 있는 애들이 하나씩은 꼭 있었을 텐데요. 제가 바로 그런 애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맨날 앉아서 말만 그리고 있어요.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아이들이 처음에는 '와 그림 잘 그린다'고 하며 모여들었습니다. 좀 우쭐했던 것도 같고요. 태연한 척 티는 안 내고 싶었지만 아마 티가 났을 겁니다. 거짓말은 잘 못 하거든요.
 
그림 잘 그리는 아이는 요상하게도 말만 그렸습니다. 공책 귀퉁이에. 스케치북 한가득히. 교과서 빈 곳에. 칠판 한 구석에. 아이들은 '와 말 잘 그린다'고 한정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어느 날 '너는 왜 말만 그려?' 하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말을 좋아해서'라는 간단한 대답으로 돌려막기에 아이의 집요함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좀 더욱 길게 풀어 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림으로 그려서라도 말이라는 동물이 얼마나 멋진 동물인지 친구들에게 널리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요.
 
누군가 왜 말을 좋아하냐고 물어봤다면 아마 밤을 새서라도 붙들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겠죠. 하지만 아이들은 말만 그리는 한 꼬마가 왜 말을 좋아하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이 친구가 1학년을 같이 등하교하기에 적당한 친구인지가 가장 중요한 시기였을 테니까요. 같이 걷는 동안 말 얘기만 할 것 같은 아이가 그에 적당할 리 없었겠죠. 잠깐 관심의 중심에 있던 아이는 그냥 '묵묵히 아무데나 말 그리는 독특한 아이'로 특정되어 그 중심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습니다.
 
하나에 꽂히면 그 하나에 영혼을 팔아버리는 기질은 아주 어릴 적부터 내재되어 있던 본능 같은 것이었나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라나며 소위 '덕후'가 되곤 하죠. 저는 '말덕'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말을 많이 타는 나라에서는 어느 정도 있는 듯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조금 드문 덕의 형태입니다. 아이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신나게 말을 그려댔습니다. 수업시간 짬짬이, 쉬는 시간에도, 점심 먹고 남은 시간에도요. 온 세상이 말로 가득찼습니다. 어디를 보든 말과 함께였죠.
 
말을 그리는 건 쉽습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이마를 먼저 그려 준 다음 길고 곧은 콧잔등을 뻗어 그려 줍니다. 그 끝에 6자 모양의 콧구멍 두 개가 있지만 대체로 생략하고 넘어갑니다. 사람 얼굴을 아름답게 그릴 때 웬만하면 콧구멍을 부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기분입니다
.
180도 자유자제로 움직일 수 있는 작은 나팔 모양의 귀를 이마 위쪽에 가지런히 그려 주고요. 입과 턱, 조금 볼록 튀어나온 뺨을 그려 주면 얼굴을 그리는 것은 끝이 납니다.
 
긴 목을 너무 두껍지도 너무 얇지도, 그리고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그려 줍니다. 목의 근육 때문에 부각되는 힘줄도 그려 넣어 주죠.
 
뒷목과 함께 연결된 완만한 등을 그려 몸의 길이를 맞춥니다. 사람 뒷목 아래쪽에 약간의 언덕 같은 턱이 있듯 말도 이 턱이 있으니 그려 줍니다. 이 튀어나온 곳이 어깨의 시작이죠. 후에 아래쪽 어깨와 가슴과 다리를 그릴 때 이곳이 기준이 되어 줍니다.
 
말의 곧게 뻗은 네 다리에는 사람에게는 없는 독특한 뼈가 있습니다. 선 채 잠을 자도 주저앉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뼈인데요. 이 뼈로 인해 말 특유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관절 모습이 이루어집니다. 그것 이외에는 사실 동물들이 거진 비슷하죠.
늘씬한 몸통과 적당히 균형을 이룬 네 다리는 사람과 조금 다른 역관절을 이루고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비슷하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굽은 발톱에 해당하고, 발목은 손바닥과 발바닥, 무릎은 손목과 발목, 허벅지는 사람의 정강이 즈음에 해당합니다. 그 감각들과 말의 뼈 위치의 움직임들을 상상하며 그려 나가면 균형 잡힌 말의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리느라 이리저리 튀어나온 다른 지저분한 선들은 지우지 않습니다. 지울 엄두를 못 내서이기도 하지만 그 선들을 통해 순간의 모습 외에도 말이 이전에 했던 행동과 앞으로 할 행동들을 상상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제 그림은 대체로 이렇게 미완성에서 끝납니다. 말의 눈이 없죠. 완성되지 않아서입니다.
 
이렇게 오늘도 눈도 콧구멍도 없는 미완성의 말 한 마리가 탄생했네요. 연습장에 샤프로 약 1분 가량 그렸습니다. 왜 발길질을 하고 있냐면, 이제 곧 할 일이 많아질 예정이라 몸을 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요란한 준비운동이죠. 관종이라 준비운동도 좀 요란합니다.
 
분명 순하다고 했는데
 
부모님은 제가 아주 순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물론 말썽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사주에 역마살이 두 개나 껴 있어서 그런지 길을 잃었다가 혼자 찿아오는 경우가 자주 있어 부모님과 일가친척 분들의 혼을 빼 놓고는 했지만, 대체로 '이런 애면 10명도 키우겠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먹으랄 때 먹었고, 자라고 할 때 잤고. 배고프거나 기저귀를 갈 때가 됐다거나 할 때 등 꼭 필요한 요청사항이 있을 때 외에는 잘 울지도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이상한 건 또래들과만 있으면 그렇게나 싸움박질을 해댄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머리숱이 유난히 많았던지라 어머니께서 머리 꾸며 보내기를 좋아하셨는데, 유치원 때 어떤 계기로 친구랑 머리채를 잡고 싸워서 선생님이 아무렇게나 다시 묶어 돌려보낸 날 기함을 하셨더랬죠.
 
초등학교 때는 남자애들이랑 주로 싸워댔습니다. 거의 아기 동물들 서열싸움처럼 물고 뜯는 드잡이질을 해댔죠. 왜 싸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림만 그려대는 조용한 애였는데요. 조용하고 독특한 아이라 놀려대기 좋아서였을까요? 일단 제가 먼저 도발한 게 아닌 건 확실합니다. 놀려먹기 좋게 생긴 것 자체가 도발이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독특한 탓에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어린시절을 파란만장하게 만든 아이 역시 결코 무사하지 못 했습니다. 한 번 싸울 때마다 둘 다 온 몸에 상처가 남았어요. 상대 아이 어머니가 여기저기 남은 상처에 놀라 애 손을 잡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가 제 얼굴에 남은 상처를 보고는 도리어 사과하고 되돌아가셨던 일도 있었죠.
 
사람에게만 해당하진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외가 조부모님 댁은 마당에 닭을 풀어 놓고 키우셨는데 그 중 우두머리 수탉이 정말 사나웠더랬죠. 명절에 일가친척이 모였는데 마당을 지날 때마다 이 수탉이 삼촌이며 이모며 오가는 사람들의 다리를 다 쪼고 있었습니다.
 
삼촌들은 무서워하는 제게 나뭇가지 하나를 쥐어 주면서 저 닭이 달려들면 이 나뭇가지를 휘둘러 쫓아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당시 그 닭이 제 허벅지까지 오고 펄쩍 뛰면 정수리까지 뛰어오를 만큼 컸어요. 제가 작기도 했구요.
 
왜 조부모님이 이 위험한 닭을 그냥 풀어 두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이 닭과 어린 아이는 싸움이 붙었습니다.
 
어떻게 싸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가족들이 닭백숙을 두고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잡은 닭이라면서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아직도 기억에 없습니다. 그저 남아 있는 건 다리 사이를 스쳐 지나가던 닭 날개 깃털의 감각과 비명소리 정도였죠.
 
그건 망아지의 발길질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말은 초식동물이라 대개 예민하고 섬세하며 거의 신경쇠약이라고 할 정도로 심한 겁쟁이입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고, 낯선 상황에는 공황을 일으키죠. 사람이 길들일 수 있을 정도로 순하고 똑똑하지만 겁이 아주 많아서 쉽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흥분한 말의 발차기는 인간이든 짐승이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죠. 매우 주의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말의 뒷발차기에 당해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 사고 사례들이 많습니다. 말의 후면으로 접근해야 하는 경우 말의 사각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도 깜짝 놀란 말의 뒷발차기에 맞을 수 있기 때문이죠.
 
말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런 것까지 닮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원하든 원치 않았든 아이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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