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_말의 영혼으로 살기

[취미] 말의 영혼으로 살기 01. 첫발

your_text 2024. 3. 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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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좋아하는 동물을 정하라. 그리고 그 동물에게 배워라. 그들의 순박한 삶을 닮는 것이다. 그들의 울음소리, 그들의 움직임을 조용히 들여다보라. 세상의 어떤 동물도 너보다는 지혜롭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인디언 테톤 수 족 '꾸중'>

 

 

방금 그린 그림입니다. 샤프로 슥슥 그리면 약 1분쯤 걸립니다. 아무 것도 안 보고 머릿속에 상상되는 모습을 종이 위에 끄집어 내는 과정입니다.

 

초중고 학교에서 미술시간에 배운 것 외에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어 명암도 골격도 구도도 엉망이라, 아마 전문가 분들이 보시면 절레절레 하시겠지만요.

 

그래도 혼자 즐겨 그리기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선이 거칠고 지저분하더라도 스스로 보기에 괜찮다 싶을 정도로는 나와 주거든요. 제 눈에 이 정도면 시원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듬직한 말 한 마리를 상상하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말과 사랑에 빠진 건 약 5살 즈음부터였습니다. TV 스포츠 중계를 통해서였죠. 원래도 유난히 동물을 좋아하던 아이가 말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말처럼 아름다운 생물이 있을까요? 긴 목에 긴 다리, 달리고 뛰어오르기에는 완벽하다 싶을 만치 균형 잡힌 몸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근육으로 둘러싸인 몸. 짧고 반짝이는 털과 커다랗고 예쁜 눈까지. 달릴 때 보이는 긴 갈기와 꼬리털은 황홀할 정도였죠.

 

마음에 드는 건 외형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보다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는데도 등에 앉은 작은 사람의 작은 신호만으로 완벽하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사려깊고, 예민하고, 섬세합니다. 사람과 친화적이구요. 하지만 맘에 들지 않으면 맹수도 죽일 수 있을 만큼의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적이 나타날 것 같으면 눕지도 않는 고집에, 언제든 달릴 수 있는 빠른 다리도, 오래 달릴 수 있는 지구력도 갖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아름답게 진화하게 만들었을까요? 북아메리카가 기원인 이들은 처음엔 숲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어깨 높이가 30센티 정도일 만큼 작았고 발가락도 여러 개였죠. 털도 꼬리도 길어서 말보다는 여우에 가까운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러다 점차 추워지며 초원으로 변하는 곳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변화해야 했겠죠. 숲과 달리 초원은 숨을 곳도 없었습니다. 천적으로부터 빠르게 도망치기 위해 길고 강인한 다리와 발굽을 갖게 되었겠죠. 추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이동해 먹이를 찾아 다녀야 했기 때문에 오래 걷고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이 필요했습니다. 큰 콧구멍과 커다란 심장도 필요했고, 탄력 있는 무릎과 발목은 필수였겠죠. 초원의 숲에 낮게 숨어 다가오는 적들에게서 빨리 도망치기 위해 서서도 잠들 수 있는 뼈와 근육을 발달시켜야 했고, 그들을 볼 수 있는 넓은 시야각과 높은 시야를 가져야 했을 겁니다. 예민한 여러 감각들도요. 이렇게 균형잡힌 아름다움은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린 저는 생각했습니다. '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죠. 왜 '말을 타고 싶다'가 아니라 '말이 되고 싶다'였을까요? 왜 5살 남짓의 어린아이는 스스로 장애물을 넘지 못하는 어떤 인간을 위해 커다란 등을 내어 주고, 아주 작은 신호를 알아들으며 움직여 주고, 누군가와 긴밀하게 호흡을 맞춰 함께 달리며 불가능한 것들을 이루어내는 멋진 일을 해내고만 싶었을까요?

 

아마 그게 저 자신도 몰랐던, 어린 제가 타고난 기질이었을 겁니다.

 

일단 리더의 기질은 아니었던 것 같죠.

 

그때부터 아이의 머릿속에 말 한 마리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얼마나 경황이 없으셨을까요? 어느 날 자신의 아이가 말의 흉내를 내기 시작하고, 망아지처럼 동네를 뛰어다니기 시작하고, 말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승마를 하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부모님은 더욱 당혹스러워졌죠. 당시 제가 사는 집은 반지하 단칸방이었고 당시 승마는 '귀족스포츠'로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가능할 턱이 없었죠. 쌀 살 돈도 빌리던 때였거든요.

 

고민하시던 부모님은 궁여지책으로 여러가지를 사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말 그림이 잔뜩 있는 어린이 생물학 백과사전, 말 이야기가 가득한 동화, 명작소설들, 그리고 당시 신문 가판대에서 팔던 펌프 경주마도 사 주셨죠. 당시 사정 안에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다 하셨습니다.

 

아이는 책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많이 고생하셨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림책을 들고 읽어 달라고 보챘거든요. 스스로 읽을 줄 알더라도 혼자 읽는 거랑 누가 읽어 주는 거랑은 또 맛이 다른 법이니까요.

 

초등학교 시절 시튼 동물기의  야생마 페이서, 검은 말 블랙뷰티는 제 바이블이었습니다. 같은 책을 또 읽고 또 읽느라 책 등이 남아나질 않았죠. 너덜거리는 책을 이어 붙여 주며 부모님은 잠시 기대하셨더랬습니다. 이 아이, 어쩌면 공부를 꽤 잘 할지도 몰라.

 

기대감에 부푼 부모님들은 아이에게 말이 나오는 생물학 백과사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이는 또 정신없이 빠져들었죠. 생물의 계문강목과속종을 외우고, 학명을 외우고, 말의 진화과정을 눈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더더욱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이 아이가 생물학자가 되려나보다.

 

예. 그 아이는 '말 그림을 취미로 그리는 구성작가'로 최종진화했습니다.

 

희망사항과 많이 다르지만 어린 시절 찍었던 스텟과 전혀 딴판은 아니었죠. 일단 책은 좋아했거든요. 말 나오는 것만 봤으니 편식이 많이 심했을지라도요.

 

이 즈음부터 부모님과 주변은 이 아이가 뭔가 요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말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시작했거든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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