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_말의 영혼으로 살기

[취미] 말의 영혼으로 살기 05. 낙마

your_text 2024. 3. 1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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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럭시노트 22 울트라에 노트펜으로 스캐치북 어플리케이션에 그렸습니다.

 

 

당시 '전국민 말타기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행했던 사업은 '초급'부터 '중급'까지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평보는 물론 경속보, 좌속보, 구보까지 배울 수 있었죠. 말을 '보내는 법' 즉 정확한 신호를 줘서 바로 평보든 속보든 구보든 할 수 있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 했지만, 말 위에서 어떻게 호흡을 맞춰야 하는지 어떻게 집중해야 하는지는 어느 정도 감을 익힌 상태였습니다.

 

중급까지 수료하고 난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승마를 배우고 싶었죠. 장비를 갖추고 승마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근교 가까운 곳에 승마장이 있더라구요. 그 중 가장 가까운 곳을 선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혹은 영광스럽게도, 그곳이 많은 선수들을 배출하고 좋은 말들을 많이 보유한 승마장이더군요. 허리 높이가 제 머리 높이를 훨씬 상회하는, 평소 본 적도 없던 크기의 거대하고 반짝반짝한 말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보통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체험 승마장 말들은 경주마를 하다가 퇴역한 '더러브렛' 종이거나 포니, 혹은 제주마입니다. 더러브렛은 경주를 위해 개량된 말이기 때문에 큰 키를 가지고 있더라도 빠르게 달리기 좋은 늘씬한 체형을 갖고 있습니다. 제주마나 포니는 어린이들이 체험하기 좋은 작달막한 체구를 가지고 있죠.

 

그러다가 '웜블러드'니 '하노버' 니 하는, 책에서나 보던 말들을 이곳에서 처음 보게 됐습니다. 빨리 달리기 위해 개량된 더러브렛보다 몸통이 크고 다리가 두텁고 발굽도 크고 움직임이 묵직하고 차분합니다. 위압감이 좀 남다른 것도 같고요.

 

말은 어떤 온도의 지방에서 왔는가에 따라 '냉혈종', '열혈종', 그리고 '온혈종'으로 나뉩니다. 뜨거운 지방에서 왔을수록 몸집이 작고 늘씬하며 야무지고, 추운 지방에서 왔을수록 몸집이 크고 털이 길고 힘이 셉니다. 열혈종과 냉혈종을 섞어 스포츠나 승용마, 쇼나 퍼레이드용으로 만든 것이 온혈종, 웜블러드죠. 더러브렛은 핫블러드, 열혈종이구요. 하노버는 웜블러드의 일종입니다.

 

올라타는데 과장 조금 보태 아파트 2층 높이는 족히 돼 보입니다. 놀랐죠. 그 옛날 작은 TV 화면으로만 보던 그 말들이 이런 크기를 가지고 있었던 거구나 싶었습니다.

 

이곳의 말들은 초보 기승 회원들을 가르칩니다. 강사 뿐만 아니라 말이 최고의 스승이었죠. 말을 타다가 등자(발을 끼우는 곳)에서 발이 빠지면 말도 걸음을 늦춰 다시 제대로 자세를 갖추길 기다려 줍니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갖추고 나면 다시 속도를 내 주죠.

 

고삐를 제대로 쥐는 방법도 가르쳐 줍니다. 제대로 쥐지 않으면 목이 한없이 앞으로 늘어지죠. 제대로 쥐어 말의 움직임과 사람의 손이 제대로 연결되면 회원의 성취에 말이 오히려 신나서는 더 달려 줍니다.

 

이곳에 있는 말들은 대체로 선수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마들이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마장마술이나 비월 연습을 마치고 나면 일반 회원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일반 회원들이 탈 즈음 되면 말들이 잔뜩 지쳐 있곤 했어요.

 

그런 말들을 타는 데에 조금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한숨 쉬는 거 들어 보셨나요? 터벅 터벅 다리를 끌고 걷다다 '아이고 죽겠다' 하듯이 낮은 '흐흐흐흥' 소리를 냅니다.

 

어느 날은 하얗고 멋있는 말이 제게 주어지는 행운이 왔습니다. 이 말을 타려는데 말이 자꾸 몸을 뺍니다. 단번에 무슨 뜻인지 알았죠. '힘들어서 태우고 싶지 않다'였습니다. 그 말은 지켜본 바 한 시간 내내 달리고 있었거든요.

 

강사는 완강했습니다. 그렇게 거부하는 말도 탈 줄 알고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죠. 우여곡절 끝에 말에 올라타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경속보 하는 내내 한숨을 푹푹 쉬어댔죠.

 

대마장을 몇 바퀴 도는 동안 말은 꾀를 부렸습니다. 도는 면적을 점점 줄였죠. 조금이라도 덜 돌려고요. 강사는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말을 바깥쪽으로 몰라고 다그쳤습니다. 말을 제어하려면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내가 원하는 교감이 이게 맞나 싶기 시작했어요. 정말 '승마'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말과의 교감이 맞았던 걸까요?

 

말은 달리는 내내 한숨을 앓는 소리를 내고 한숨을 푹푹 쉬어댔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날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습니다. 바람 때문에 환풍기가 세게 돌아가 소리가 나면 말들이 조금 놀라 튀어나가곤 하는 날이었죠.

 

바람이 훅 불자 이 말이 몸에 힘을 훅 주더니 앞으로 튀어나가기 시작했어요. '이게 맞나' 하고 딴생각을 하고 있던 저는 그 순간적인 튀어나감에 대비하지 못하고 낙마했습니다. 과장 조금 보태 아파트 2층 높이에서요.

 

떨어지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말이든 나든 둘 중 누군가가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해야 한다면 그건 제가 원하는 교감이 아니었습니다. 승마는 저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리고 다시 한 번 상기시켰습니다. 저는 애초부터 '말을 타고 싶다'가 아니라 '말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을요.

 

늦게 알아챈 대가는 굉장히 쓰라렸습니다.

 

다시 말에 올라탔을 때 허리쪽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고, 다음날 꼬리뼈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됐죠. 승마는 중단해야 했습니다. 이 후유증은 아직까지도 날씨가 좋지 않을 때마다 몸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을 탈 기회가 생기면 아직도 해 보고자 하는 꿈을 꿉니다. 그만큼 말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거든요. 말과 맞닿아 있을 때의 따뜻한 체온과, 호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을 때의 즐거움과, 서로의 시야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확신했을 때의 그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체감은 굉장히 중독적입니다. 경험해 본 적 없으시다면 한 번쯤 경험해 보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아니 그렇다면 대체 제가 원하는 '말이 되는 것'은 뭐 뭐 어떻게 해야 가능한 일인가요. 다시 말로 태어나야 하는 걸까요? 말이 되긴 한 일인가요?

 

이것에 대한 답을, 저는 뜻밖에도 '게임'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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