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문
2. 제목 - 미스트, 안개 속을 헤매는 이야기
3. 두 층으로 활용되는 무대와 동선
4. 3명의 입체적 인물
5. 고저의 진폭이 큰 드라마틱한 넘버들
6. 앞으로 발전될 부분
7. 맺음말
1. 서문
오랜만에 찾은 공연장은 한겨울보다 조금 따뜻했고, 여전히 익숙한 풍경들이었습니다. 뮤지컬 미스트가 첫공연되는 날, 대학로 링크아트센터 1층 로비에는 먼저 공연되고 있는 연극 '아트'의 관객들과 뮤지컬 '미스트'의 관객들이 저마다 모여서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요. 늘 그곳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설렘 가득한 목소리들을 들으면서 앉아 있으니 기분이 들뜨더군요. 공연의 시작은 공연장 안에서가 아닌 이 들뜬 목소리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일을 하고, 일을 마치고 나면 원하는 공연을 보러 공연장을 찾아와 마음 맞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앞으로 할 공연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공연을 관람하고, 끝나고 난 뒤 또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는 이 평범한 나날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 땅이 이름을 잃었더랬죠. 이름을 찾은 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았어요.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이 날이 있기까지 많은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목숨이 있었습니다. 3월은 3.1절이 있는 만큼 특히 많은 이들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다 보면 앞에 어스름하게 보이는 것이 나의 친구인지 연인인지 적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죠. 이 시대에는 모두가 그랬을 것입니다. 뮤지컬 미스트는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안개 속이었을 일제강점기, 작은 빛 하나를 의지해 새벽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2. 제목 - 미스트, 안개 속을 헤매는 이야기
안개가 싸인 동경의 밤. 한 사람의 실루엣이 밤거리를 가로지릅니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데요. 총에 맞은 것 같습니다. 왼쪽 복부에 손을 대고 있어요. (공연 제작사 네오 및 네오 계열사 작품 속 인물은 총에 맞거나 칼에 맞는 등 다칠 때 왼쪽 복부 위주로 다치는 전통이 있습니다) '선'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그를 잘 아는 듯이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며 발악하지만 남자는 그를 많이 아끼는 듯 먼저 가라고 보내는데요.
혼자 도망치다 쓰러진 남자에게 선과 한 여자가 다가옵니다. 여성이 다이죠부데스카? 하면서 일본어로 말을 거는데, 남성은 '조선인이오' 하면서 정신을 잃죠. (왜 밝혔을까요?)
다행히 여성 역시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친 남성을 여성의 집으로 옮기죠.
여성은 친일파 조선 귀족의 딸로서 동경으로 유학을 와 있는 상황인 듯합니다. 혼자 사는 집에 선이라는 하인이자 동생 한 명만 두고 있는 듯하구요.(그녀의 아버지는 굉장하군요. 이렇게 둘만 달랑 보내다니요.) 그래서 그 집에 다친 남자를 숨겨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일어나자마자 눈에 보이는, 자신이 누워 있는 호화로운 소파와 주변의 호화로운 집기와 처음 보는 서양화들에 넋이 나갑니다.
여자는 '혜인'이라고 자신을 밝히구요. 선이와 자신이 남자를 발견해 데리고 왔다고 하죠. 동경에서 총을 맞으며 쓰러진 조선인이 어떤 사람일지는 모두 짐작 할 테구요.
선이는 혜인에게 자신이 남자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두 사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간 선이의 입지도 위험해질 테니까요.
혜인이 남자의 이름을 묻지만, 남자는 자신 같은 존재가 이름을 가지는 것은 사치라며 알려주지 않습니다. 혜인은 그가 회복할 때까지 이곳에서 함께 지내려면 부를 이름이 필요하다며 이름을 지어 주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우연'이라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그렇게 세 사람의 기묘한, 그리고 아주 잠깐의 행복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이들 앞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로요.
3. 두 층으로 활용되는 무대와 동선
공연장에 입장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2층에 자리한 동그란 조명들입니다. 마치 비가 내리는 창 밖의 불빛들처럼 동그랗게 번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모습인데요. 점멸되었다가 다시 밝게 타오르고 또 점멸되는 모습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괜히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무대는 2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층 중앙과 왼쪽 '바'는 세 사람이 주로 함께 만나고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구요. 가운데의 소파는 우연이 누워 있을 때 잠깐 사용되다가 사라지는군요.
오른쪽은 혜인의 집으로 사용됩니다. 1층은 혜인이 선이와 우연을 마주하는 외면을, 2층은 혜인 혼자만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2층 오른쪽은 왼쪽과 다리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로 밤길을 은밀히 오가는 남자, 우연이가 이곳을 사용합니다. 다리를 건너가면, 선이와 우연이가 독립을 위해 은밀히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소가 나옵니다. 객석에서 바라볼 때 이 왼쪽 부근은 우연과 선의 장소네요.
우연이 등 세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하러 나설 때는 주로 무대 중앙 뒤편을 열고 나갑니다. 문을 닫고 나면 그림자의 움직임만 보이죠.
흥미로운 건 선이가 초반에 위 아래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후반부 가면 1층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 하구요. 왜일까요.
4. 3명의 입체적 인물(스포 주의)
세 명 모두 아주 극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공연 속 상황이 이어지는 동안 시대적 상황이,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받는데요.
삶을 등한시했던 남자는 한 여자를 만나 삶을 생각하게 됐구요. 조선도 동경도 현실도 아닌 그림 속으로 도망치던 여성은 한 남자를 만나 현실을 다시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과 아가씨와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했던 동생은 시대의 잔혹함을 여러 번 얻어맞고 망가져버리죠. 그 시대 가장 잔혹하게 망가진 사람들의 상징 같기도 합니다. 일제가 어떤 식으로 친일파를 만드는지, 어떤 공포가 사람을 괴물로 내모는지, 거기에 저항하지 못한다 해서 속편히 비난할 수 있는지, 나는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는지 같은 여러 생각을 해 보게 되네요.
안개 속에서 헤매다 보면 각자 같은 방향을 보며 달린다고 생각해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엇갈리기 마련입니다.
... 근데 의상이 너무나 아름답네요.
특히 혜인의 의상은 계속 사진 찍어 두고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두 남성의 의상도 어둡고 깔끔한 정장이나 폴라에 코트라서 군더더기 없이 멋집니다.
5. 고저의 진폭이 큰 드라마틱한 넘버들
곡들의 고저가 엄청납니다. 낮은 곡은 엄청 낮고 높은 곡은 이렇게 높을 수가 싶을 정도로 높은데 모든 곡들을 배우 분들이 너무나 잘 소화해 줍니다. 진행될수록 목이 괜찮을까 싶긴 한데... 괜찮겠죠(...)
첫공 멤버는 이정화 배우, 김종구 배우, 선한국 배우였습니다. 이정화 배우는 믿보배라고 할 정도로 여러 작품에서 귀호강을 담당해 준 배우 분이구요. 김종구 배우는 높은 음을 도약도 없이 쏘아올리는 재주를 가졌는데 낮은 음도 탄탄히 갖고 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입니다. 선한국 배우는 이번 작품에서 세 번째로 만나는데 이렇게나 연기도 노래도 굉장하군요. 새로운 믿보배 등극하실 것 같습니다.
공연 중 소품이 부러지는 참사가 있었는데 조금 당황한 것 같지만 잘 해 내 주었으니 남은 기간 동안 별 탈 없이 진행될 겁니다. 액뗌 했다 생각하십쇼.
6. 앞으로 발전될 부분
- 여러 가사가 한꺼번에 들리는 부분이 있는데 마이크 볼륨이 작은 것인지 세 명의 가사가 다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진행하면서 테크닉적으로 조정이 되겠죠.
- 대본이 많이 바뀐 티가 아직 나는 편입니다. 대사가 물릴듯 말듯, 대사가 씹힐듯 말듯. 이것은 극이 진행되면서 대사가 입에 붙고 감정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훨씬 훨씬 좋아질 부분입니다. 지켜볼 시간들이 벌써 기대되네요.
- 조명이 도망가는 걸까요. 아니면 사람이 늦는 걸까요. 웨스턴스토리 내가 진짜 주인공 보는 듯한 장면이 몇 있었는데 괜찮아지겠죠?(공교롭게도 무대 위에 도망친 와이어트와 조세핀이 있었네요?)
- 선이... 누굴 속이는 게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손이 떨리나봅니다. 소품 조심합시다. 유리잖아요?(...)
-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한 곳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왜 혜인의 아버지는 혜인을 선이랑만 동경에 보냈는지'라든지..(..) 딸을 아끼는 아버지가 그게 가능한 일인지.. '그 칙서가 왜 중요한지, 무슨 내용인지, 어디로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라든지. 선이가 부르던 그 노래는 누가 가르쳐 줬는지,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뭐길래 우연이가 따라 불렀고 혜인이 이어 불렀는지 등.
7. 맺음말
공연을 보고 나서 바깥으로 나오며 지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입니다. 지금이라는 게 있기까지 지금을 꿈꿨던 사람들은 비단 제가 보고 왔던 이들 뿐만이 아니겠죠. 우리가 알고 있고 위인이나 의사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분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들 중 그곳에 있었던 사람 세 명을 더 발견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들도 즐겁고 싶었을 테고, 사랑하고 싶었을 테고, 살고 싶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이 '사치'였던 시절에 안개 속을 헤매며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젊은 청춘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한 번쯤은 미스트 같은 작품을 보면서 그곳에 그들이 있었음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된다면 뜻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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