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창작들

[동화] 소녀를 사랑한 나무

your_text 2024. 3. 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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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작은 2층집 정원에 커다란 나무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집의 지붕 꼭대기에 닿을 만큼 커다란 크기를 자랑했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과 함께 달콤한 과실이 열려 집 식구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주곤 했습니다.

 

나무는 오랜 세월 이 집에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봐 왔습니다. 지금의 집주인이 어린 시절을 보내는 모습도 지켜봐 왔죠. 나뭇가지에 줄로 타이어를 묶어 그네를 타던 모습을 기억했습니다. 꼭대기 근처까지 기어올라가다가 떨어질 뻔한 기억도 선명했죠.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 지금은 이 집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정을 꾸렸습니다.

 

나무는 특히 그가 낳은 딸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활달하고 기운이 넘치는 아가씨였죠. 어릴 때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며 나뭇잎을 던지며 놀았고, 좀 더 나이가 들자 자기 아버지 어릴 때처럼 나뭇가지를 타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자 가끔 늦은 밤 나무를 타고 집 밖으로 나가거나 혹은 몰래 나무를 타고 들어오곤 했죠.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자신처럼 그 나무에서 떨어질까봐 매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무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혹시나 나뭇가지가 부러져 그녀가 떨어질까봐 가지 하나 하나 튼튼하게 키워야 했습니다.

 

소녀는 이 나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집 2층에 살고부터 나무는 있는 힘껏 그녀의 창문 앞으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창가에서 손을 뻗으면 가지가 손에 닿을 정도로요.

 

봄에 창문을 열면 나무에서 핀 꽃 향기가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고, 꽃잎이 침대 위로 흩날렸습니다. 

여름이면 뜨거운 햇빛을 나무의 이파리들이 막아줬죠. 그녀의 방은 항상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싱그러운 잎사귀의 향이 함께했습니다.

가끔 험한 바람이 불 때면, 나무가 우거진 나뭇가지로 창문을 막아서서 다른 위험한 것들이 날아오는 것들을 막아 주었습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칠치면 귀신의 울음소리 같다던데. 소녀는 나무가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을이면 창문 가까이 가지를 뻗어 달콤한 열매 하나씩, 예쁜 단풍잎 하나씩을 선물하곤 했습니다.

겨울에는 열매도 이파리도 없었지만 가지 위로 핀 눈꽃이 정말 아름다웠죠.

소녀의 삶에 있어 나무는 행복함을 알게 해 주는 소중한 무언가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 날.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남자는 난봉꾼이었습니다. 그녀를 한밤중에 몰래 데리고 나가려 나무를 타고 오르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쳤죠.

 

두 번째 남자는 망나니였습니다. 집에 초대되어 점잖은 척하다가 집에서 나가는 길에 소녀와 싸우게 되었는데, 그러다 소녀를 때리려 손을 올렸습니다. 그때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에 정수리를 얻어맞고 쓰러지지 않았다면 소녀는 크게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소녀의 아버지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내쫓아버렸죠.

 

세 번째 남자는 허세꾼이었습니다.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자랑했죠. 하지만 자신이 말한 막대한 재산만큼의 빚을 진 떠돌이였습니다. 그는 소녀와 여러 여자들을 한꺼번에 사귀다 다른 여성과 마을에서 도망쳤습니다.

 

이별을 겪을 때마다 상처입은 소녀는 매번 눈물로 밤을 지새웠죠.

 

그러다 마침내 소녀와 잘 어울리는 잘 생긴 청년을 만났습니다.

 

나무는 청년과 소녀가 자신들의 사랑을 허락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소녀는 청년을 저녁식사에 자주 초대해 가족들과 자주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청년의 집 저녁식사에 자주 참석해 자신을 알렸죠.

 

소녀는 아주 늦은 밤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타고 2층 창문으로 올라가는 소녀를 묵묵히 받아주었습니다.

 

청년이 몰래 찾아와 소녀의 방 창문을 넘는 날도 있었습니다. 나무는 두 남녀가 새벽까지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나란히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청년이 다시 조용히 창 밖으로 나가는 것을 도와주었죠.

 

가족들 대부분은 두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였지만, 소녀의 아버지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꽃다발과 반지를 들고 프로포즈를 하러 온 어느 주말, 소녀의 아버지는 그에게 집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소녀의 부탁에도 아버지의 뜻은 완강했습니다.

 

모두 그가 포기하고 떠나갈 거라고 생각했으나, 청년 또한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무 아래 앉아 문이 열리길 기다렸습니다.

 

소녀의 아버지와 청년의 침묵의 대결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자는 말없이 나무 아래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고, 아버지 역시 꿈쩍하지 않은 채 그가 떠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대결은 해가 질 때까지도 계속됐죠.

 

쌀쌀한 가을날 소녀는 남자가 춥지 않을까 걱정이었습니다. 2층 창문에서 하염없이 나무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봤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가족과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늦은 밤까지 나무 아래에서 떨고 있는 남자를 보며 소녀는 나무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자신을 도와달라구요.

 

그러자 잠시 후. 바람이 불어와 가지에 있던 단풍들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습니다. 그리고 추위에 떨고 있던 남자의 몸 위를 덮어 주었죠.

 

 

소녀는 그를 위해 기적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모포를 들고 나무를 타고 내려가 그를 덮어 주고는 자신의 몸으로 감싸주었습니다. 함께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죠.

 

 

다음날 새벽 바깥으로 나와 본 가족들은 둘의 사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서로 춥지 않도록 안고 있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이 춥지 않도록 낙엽을 남김 없이 떨어뜨려 포근하게 감싸 주고 있는 나무의 모습에 아버지 역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소녀가 결혼하고 집을 떠나던 날 이후, 나무는 오래 살지 못 했습니다. 집보다 오래 살았던 큰 나무를 잘라내는 수밖에 없었죠. 가족들은 많이 서운해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집을 소녀의 가족이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소녀가 쓰던 2층 방은 그녀의 딸이 쓰게 되었죠.

딸은 자신의 방이 될 곳에서 엄마가 쓰던 물건들을 둘러보다가, 침대 밑에 있던 작은 씨앗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씨앗을 보여주었죠. 어머니는 그것이 나무가 자신의 방에 하나 둘씩 톡톡 던져 주던 열매의 씨앗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가족은 그 씨앗을 나무가 있던 자리에 심었습니다. 그리고 씨앗이 다시 나무가 되어 자라길 기다렸죠.

그 자리에서 싹이 자라나 소녀와 마주보았습니다. 어린 소녀는 이 새싹과 단숨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가족은 자신들을 맺어준 나무처럼 이 새싹이 딸과 함께 멋지게 자라나길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집에서 새싹을 돌보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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