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창작들

[동화] 해질녘의 말벗

your_text 2024. 3. 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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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국 시골의 한 마을.
커다란 말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고든 씨의 마구간에서 노을색 망아지 한 마리가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힘차게 발길질을 하며 숨을 고르는 망아지에게 고든 씨는 썬셋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썬셋은 고든 씨 집안의 10살짜리 막내딸 에밀리가 타고 다닐 승용마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고든 씨는 이 망아지가 자신의 딸과 좋은 친구로 남아 주길 신께 빌며 애지중지 보살폈습니다.
 
하지만 망아지는 고든 씨의 바람과 달리 야생마처럼 자라고 있었습니다.
 
발굽이 튼튼해지자 마구간 벽을 걷어찼고, 귀리가 든 말 구유를 엎어 마방 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방 밖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을 만큼 키가 자라자 멋대로 문을 열고 나가 농장의 열매들을 다 따 먹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가 하면, 비 오는 날 진흙탕을 뒹굴며 돌아와 빛나는 털을 온통 진흙투성이로 만들어 놓고는 마부들의 진땀을 빼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씻기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썬셋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마부들의 옷자락을 질겅질겅 씹어 넝마로 만들어 놓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썬셋을 고든 씨는 망나니라고 불렀고, 고든 씨의 마부들은 '블러디 썬셋'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썬셋이 따르는 단 한 명의 사람은 고든 씨의 막내딸 에밀리였습니다.
 
에밀리는 망아지가 태어났을 때부터 자라나는 모습들을 하나 하나 그림에 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미친 망아지처럼 사방으로 발길질하며 날뛰며 놀던 썬셋도 그녀가 날씨 좋은 날 말목장에 앉아 그림을 그릴 때면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썬셋은 그녀의 앞에서만 얌전했습니다. 고든 씨의 마구간 식구들은 이따금씩 이 망나니 같은 노을색 망아지가 소녀의 무릎을 베고 천사처럼 잠드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고든 씨는 썬셋이 그녀의 좋은 친구로 자라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에밀리가 말을 탈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썬셋 역시 사람을 태울 수 있을 만큼의 젊은 말이 되었습니다.
 
고든 씨는 이제 썬셋이 그녀를 태울 수 있도록 여러 모로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 돌에 발이 다치지 않도록 발에 편자를 박아야 했고, 입에 재갈을 물 줄도 알아야 했고, 등에 안장을 얹어도 얌전하게 그녀를 태우고 걸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썬셋은 이 모든 것을 거부했습니다. 재갈은 아무리 입에다 끼우려 해도 뱉어냈고, 등에 안장을 얹으면 이로 물어 내팽개쳤습니다.
 
발에 편자를 박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 했습니다. 마부 중 썬셋에게 편자를 박을 수 있는 용기 있는 마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고든 씨가 시도하려다 괜히 옷에 구멍만 여러 개 만들 뿐이었습니다.
 
고든 씨는 에밀리에게 다른 말을 타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에밀리는 의외로 쉽게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자신의 아버지가 오래도록 탔던 얌전하고 나이 든 말을 골랐습니다.
 
고든 씨는 물었습니다.
 
- 에밀리. 썬셋을 타고 싶진 않니?
 
에밀리는 대답했습니다.
 
- 친구를 어떻게 타요?
 
고든 씨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 썬셋은 널 태우기 위해 태어났단다.
 
에밀리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 누구도 누군가를 태우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요.
 
고든 씨는 자신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 그럼 너에게 준 내 말 프레디경은?
 
에밀리는 작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 아빠를 오랫동안 지켜준 프레디경에게 저를 부탁하는 거죠.
 
고든 씨는 자신의 막내딸이 참 독특한 성정을 타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썬셋이 망나니 같은 기질을 타고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썬셋은 누구도 타지 못할 말이 되었습니다. 노을색의 윤기 나는 털이 아름다워서 누구라도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훌륭했지만, 고든 씨도 마부들도, 이 훌륭하고 늘씬하게 자란 말의 등을 넘보지 못 했습니다.
 
고든 씨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팔더라도 누군가가 탈 수 있어야 팔 수 있을 텐데.
 
고든 씨가 아내와 이 이야기로 고민을 나누는 동안, 안타깝게도 에밀리가 이 말을 들어버렸습니다. 에밀리는 뒷걸음질쳐 자신의 방으로 도망쳤습니다.
 
고든 씨 부부는 이 일이 별다른 일이 아니길 빌었지만, 밤새 운 다음날 에밀리는 열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에밀리의 어머니는 그녀의 베개가 땀과 눈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에 놀라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지만 결국 자정이 넘어서까지 그녀의 열은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끙끙 앓던 에밀리는 고열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에밀리의 이름을 부른 그 순간, 마굿간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습니다.
 
고든 씨가 밖을 내다보니 노을색 말 한 마리가 마굿간을 박차고 나가 어디론가 달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썬셋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고든 씨도 정신을 차리고 의사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말에 올라 타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고든 씨가 병원으로 달리자 썬셋이 옆으로 따라붙었습니다. 고든 씨는 영문을 몰랐지만 딸의 건강이 우선이었습니다.
 
다행히 왕진을 할 수 있는 의사는 있었지만 그에게는 말이 없었습니다. 고든 씨는 자신의 말을 태워 주고 싶었으나, 큰 성인 남성을 태우고 온 힘을 다 해 달린 말은 이미 너무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썬셋이 의사의 소매를 물고 잡아끌었습니다.
 
고든 씨도, 의사도 모두 이 의미를 알아챘습니다.
 
의사를 태운 썬셋은 마치 하늘을 가로지르는 혜성처럼 달렸습니다. 의사는 훗날 이때처럼 빠르게 달린 경험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의사가 제 때 빨리 도착한 덕에 에밀리는 늦지 않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던 마구간 식구들은 거품 같은 땀을 흘리고 있는 썬셋에게 물을 먹이고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몸을 씻긴 다음 체온을 잃지 않도록 모포로 몸을 덮어 주며 맛있는 먹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대견해 했죠. 집안 식구도 마부도 에밀리 아가씨마저도 아무도 태워 주지 않았으면서, 한 번도 못 본 낯선 의사를 태울 생각을 했냐고 말입니다.
 
에밀리는 곧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썬셋을 어떻게 할 거냐고부터 물었죠.
 
고든 씨는 말했습니다.
 
- 그 애는 너의 친구란다. 너와 썬셋 둘이 상의해서 정하려무나.
 
고든 씨는 자신이 신에게 무엇을 빌었는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썬셋이 그녀의 '좋은 친구'로 자라나길 빌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에밀리는 아버지의 결정에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에밀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썬셋을 보러 간 것이었습니다. 썬셋은 목장에서 마부들의 예쁨을 받으며 앞에 놓인 사과를 잔뜩 집어 먹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에밀리는 썬셋의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고마움을 표하고는, 그가 갇혀 있던 목장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썬셋은 열린 문을 바라보더니 지평선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지기 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시 목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로는 혼자, 또 때로는 다른 말과 함께.
때로는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에밀리는 간혹 아버지가 물려준 프레디경을 타고 썬셋과 지평선을 달리곤 했습니다.
 
고든 씨의 목장은 좋은 말들을 키우기로 유명한 목장이었지만, 썬셋이라는 야생마 무리가 오가며 그 주인들과 친분을 나누는 목장으로 더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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